신용회복경험담
농촌 엄마의 유학비 빚과 다시 일어선 이야기
- 최고관리자 12일 전 2025.06.1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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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입부: 채무 발생 전의 일상적인 삶 (약 15%)
전라남도의 한 시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고추, 마늘, 잡곡을 키우며 살았고, 두 자녀는 도시로 나가 공부했습니다. 형편이 넉넉한 건 아니었지만, 아이들만큼은 공부 걱정 없이 살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큰아이는 국내 대학을 졸업했고, 둘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외국에 관심이 많아 결국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처음엔 반대했지만,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는 아이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유학이, 제 인생의 빚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2. 전개: 채무 발생과 악화 과정 (약 25%)
처음 1~2년은 준비해둔 적금과 소농지원금 등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외화 환율이 올라가고, 현지 생활비가 생각보다 많이 들면서 대출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등록금은 학기당 1,200만 원이 넘었고, 생활비도 월 200만 원 가까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은행에서 학자금 목적의 신용대출을 받고, 카드로 항공권·비자 비용까지 충당했습니다. 카드값을 돌려막기 하다 보니 어느새 신용카드 두 곳에서 각각 1,000만 원 이상이 쌓였고, 은행 대출은 두 곳 합쳐 5,500만 원이 넘었습니다.
농사로 들어오는 돈은 계절에 따라 편차가 큰데, 해마다 이상기후로 수확이 줄고 가격도 폭락해버리니 대출 이자는커녕 생계비도 빠듯했습니다. 남편은 이를 알면서도 말없이 더 일했고, 저는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3. 위기: 개인회생 결심까지의 상황 (약 20%)
결정적인 순간은 연체로 인해 카드회사에서 ‘채권추심 통지서’가 왔을 때였습니다. 전화가 하루에도 수십 통, 집에 찾아온 추심인의 방문까지 겪으며 “이제는 감당할 수 없다”고 실감했습니다.
아이에게 말할 수 없어 혼자 끙끙 앓다가, 이웃 아주머니에게 털어놨습니다. 그분도 몇 년 전 개인회생을 했었다며, 창피한 게 아니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렇게 처음 법률 상담을 받으러 읍내로 갔던 날, 마음 한편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동시에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제라도 방법이 있구나” 싶었거든요.
4. 해결: 개인회생 진행 과정 (약 25%)
개인회생 절차는 생각보다 복잡했습니다. 채권자 목록 정리, 수입·재산·지출 증명, 농지원부와 각종 서류 준비까지 직접 해야 할 일이 많았고, 매번 읍사무소와 법원, 은행을 오가며 정신이 없었습니다. 상담부터 법원 인가 결정까지는 약 5개월이 걸렸습니다.
법원에서 최종 인가받은 변제계획은 월 38만 원씩 3년간 변제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총 1,368만 원 정도를 상환하면, 나머지 채무는 면책되는 구조였습니다. 채무 원인이 자녀 교육비였고, 성실한 납부 의지를 보였기 때문에 인가가 어렵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힘들었던 건, 주변 시선보다도 ‘내가 왜 여기까지 왔나’ 하는 자책이었습니다. 하지만 변제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오히려 마음이 정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일정한 액수를 낸다는 게, 처음으로 빚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5. 결말: 현재의 변화와 희망 (약 15%)
이제 개인회생 시작 후 1년이 지났습니다. 농사일 외에 주말에는 소규모 가공식품 판매도 시작하며, 수입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직도 부족한 생활이지만, 정기적으로 변제금을 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합니다.
무엇보다 아이가 이제는 졸업을 앞두고 취업 준비 중이고, 그동안 엄마 덕분이라며 울먹이던 모습이 잊히질 않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내 탓이 아니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셔야 합니다. 누구나 아이를 위해, 가족을 위해 선택한 결정이었을 겁니다. 상황이 어렵다면 혼자 끌어안지 말고 꼭 상담받아보세요. 개인회생은 포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살아가는 길입니다.